본문 바로가기
Better Days Ahead

한국 최초의 실용음악과는 어디? (1)

by 채감독 2020. 2. 25.

대입 경쟁률 - 2019년 전국 4년제 대학교 신입 평균 경쟁률은 9.1:1 이다.

2020 대입 정시지원전략 설명회에서 수험생 학부모가 배치표를 살피고 있다.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2019년 8월 대학알리미 사이트에 공시된 2019학년도 전국 대학(4년제 대학 기준으로 일반대학, 교육대학, 산업대학, 각종대학, 기술대학 포함,방송통신대학 및 사이버대학은 제외) 신입생 정원내 경쟁률을 보면, 서강대가 28.7대 1(전년도 26.7대 1)로 가장 높았고, 중앙대(서울) 24.5대 1(전년도 26.0대 1), 한국예술종합학교 23.4대 1(전년도 23.4대 1) 이 뒤를 잇는다. 전년도에도 서강대가 26.7대 1로 가장 높았다. 한국 대표 대학 서울대는 6.7대 1(전년도 6.8대 1), 고려대(서울)는 8.0대 1(전년도 7.3대 1), 연세대(서울)는 16.5대 1(전년도 16.7대 1) 등의 경쟁률을 나타냈다. 

실용음악과 경쟁률 - 두자릿수 경쟁률은 명함을 내밀기도 어렵다.

서경대학교 실용음악학과 홈페이지 캡쳐

실용음악과의 경쟁률은 상상을 초월한다. 실용음악과는 드럼, 베이스, 기타, 건반, 작곡 등등의 세부전공으로 구분되는데, 특히 경쟁률의 끝을 달리는 부문은 단연 보컬전공이다. 2019년도 서경대학교 실용음악과 보컬전공은 3명 모집에 1,863명이 지원해 621:1 의 경쟁률을 보였다. 한양대학교 에리카 캠퍼스에는 4명 모집에 서경대보다 다소 많은 1,910명이 지원하여 477:1 의 경쟁률을 보였다. 이 밖에도 단국대학교 생활음악과에 171:1, 서울예술대학교는 남자가 277:1, 여자가 350:1 동아방송예술대학교의 남자는 162:1, 여자는 201:1 의 경쟁률을 기록한 바 있다. 
각 학교마다 보컬전공이 가장 인기 있는 분야이지만 여타 기악부문 뿐 아니라 실용무용 전공을 개설한 학교들도 엄청난 경쟁률 속에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대학 교육과정에서 춤과 노래, 연주를 배우려는 열기와 도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최초의 사립 음악교육기관 조양구락부 (1909)

조선왕조까지는 정식으로 음악을 교육하던 공교육 기관이 있었지만, 대한제국시기에 기존의 장악원, 군악대 등이 폐지 되면서 정부 차원의 음악교육전승이 중단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민간의 뜻있는 지사들이 설립한 최초의 민간 음악교육기관이 바로 조양구락부이다. 하지만, 발기인 12인 중 유길준, 민영찬을 제외한 모두가 친일파였기 때문에 주체적인 교육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양구락부의 주요 4가지 사업은 

1) 구가 (舊歌) : 남창과 여창의 우조와 계명 및 가사 등
2) 구악 (舊樂) : 거문고, 가야금, 양금, 생황, 단소 그 밖의 각종 악기
3) 신악 (新樂) : 풍금, 사현금, 바이올린을 주로 하되 그 밖의 각종 음악을 포함
4) 음악보 (音樂譜) 를 편집함

중국 송나라에서 들여온 사현금은 4개의 줄로 만든 현악기여서 간혹 바이올린의 전신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원형이미지를 보면 다리에 얹어 연주하는 형태인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구가와 구악은 우리나라 전통의 음악 분야였으나 신악은 서양의 악기와 연주를 도입한 것으로, 개화기 조선의 전통음악과 서양의 음악이 공존하는 시대에 "전통음악계승"과 "서양음악발전"을 조화롭게 소화하기 위한 측면이 잘 나타난다. 

우리나라에 서양 음악이 처음 소개된 것은 1885년으로, 이로부터 불과 24년 만에 교수진을 갖춘 정식 학원이 설립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격변하는 시대상을 감안하면 실로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서양 음악이 교육과정에 포함된 사례는 한국 교육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홍난파가 성악 2기 졸업 후 다시 3기 기악과를 나온 졸업생이다.

일제강점기에 널리 애창되었던 가곡 "봉선화"와 동요 "고향의 봄"의 작곡가 홍난파. 남양 홍씨로, 경기도 화성시 태생이지만 미국 유학 이후 "모리카와 준"으로 창씨개명하고 일제에 아첨하는 음악을 다수 작곡하면서 친일행적을 남겼다. 직업형(생계형) 친일인사로 친일 여부에 대한 공방이 있었지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는 결국 등재되었다. 

관기 출신 기생들의 연합단체인 기생조합의 교육을 담당했고 (이때부터 위탁교육이란 것을 했다) 그 결과로 관기 출신 기생과 민간 기생 간의 가무 격차가 상당히 해소되었다고 한다. 당시는 외국에서 사절단이 오거나 국가적인 대외 행사 등에서 귀빈을 접대하는 공무원 기생이 이른바 관기 였던 것인데, 아무래도 민간 기생보다는 춤과 노래 등 예능적 수준이 떨어졌다고 한다. 조양구락부는 이 후 순탄치 못한 역사를 거쳐 왔는데 1911년 조선정악연습소로, 1935년 조선정악전습소로 바뀌더니 1947년에는 조선정악원으로, 그리고 광복 후에는 한국정악원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명치 38년 (1905년) 6월 20일에 촬영된 당시의 관기. 조선시대에는 3년마다 한 번 씩 각 지방 노비 중 어린 소녀를 뽑아서 서울로 올려보내었는데 이들을 '장악원'에서 노래와 춤을 익혀서 왕실잔치 때 출연시켰다.  

조선 노비들, 천하지만 특별한

조선정악전습소

1911년 조선정악전습소 졸업사진

기록에 따르면 조선정악전습소는 중등 이상의 학력이 있는 15세 이상이면 지원 및 입학이 가능하였다고 한다. 당시 정원은 50명으로, 전공에 따라 주 5~6회 수업을 하였고 수업료는 기악이 월 1원, 성악은 그 절반인 월 50전 이었다. 풍금과 사현금 전공은 주 1회 수업에 회당 20전이니 월 80전에서 1원 정도의 수업료를 낸 모양이다. 당시 1원을 쌀값으로 환산하여 계산해 보니 현재 가치로 약 25,000원 정도인 듯 하다. 생각보다는 그리 비싸지 않은 수업료이다.  과정은 가곡/거문고/사현금은 1년 과정이고, 가얏고/단소는 6개월, 양금은 3개월 과정으로 개설 되었다. 

조선정악전습소는 이화여전 음악과가 설립되기 전까지 유일하게 운영되던 전문음악교육기관이었기 때문에 당시 사회와 이후에 까지 큰 영향을 미친 기관이다.

 

한국 최초의 실용음악과는 어디? (2)

 

한국 최초의 실용음악과는 어디? (2)

최초의 대중예술 전문 교육기관 오케음악무용연구소 개화기 조양구락부와 이를 이어받은 조선정악전습소는 공교육에서 민간교육으로 넘어온 최초의 음악교육기관이었지만 구가와 구악 등 전�

chaegamdoc.tistory.com

 

 

채승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