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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실용음악과는 어디? (2)

by 채감독 2020. 3. 6.

최초의 대중예술 전문 교육기관 오케음악무용연구소

조선악극단 북경공연 중 이화원에서 단원들과 함께 한 이철 부부. 오른쪽이 이철, 가운데가 부인 현송자. (사진 : 한국콘텐츠진흥원)

개화기 조양구락부와 이를 이어받은 조선정악전습소는 공교육에서 민간교육으로 넘어온 최초의 음악교육기관이었지만 구가와 구악 등 전통의 음악 계승이라는 중요한 목표 아래 설립 되었다. 이와는 달리 대중예술, 즉 상업예술을 위한 한국 최초의 전문교육기관은 조선악극단이철이 1933년 설립한 오케음악무용연구소이다. 이철은 조선연예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조선의 공연 산업을 석권한 인물로, 지속적인 대중예술 인재발굴과 양성을 위해 오케음악무용연구소를 설립하였다. 당시 이철 소장과 함께 13명의 교수진이 엄격하에 선발된 생도들을 교육했다.음악의 김형래, 무용의 김민자, 조영숙, 이준희 등이 대표적인 교수진이었다.

오케음악무용연구소 생도들. 1944년 무렵 이철의 무덤을 찾은 풍경이다. (사진 : 한국콘텐츠진흥원)

당시 학생이었던 백설희에 의하면

"다리가 쭉 뻗고 얼굴 좀 괜찮고"

가 1차 심사 기준이었다고 한다. 정규 수업은 음악, 수신, 무용 각 1시간씩 하루 3시간 이었다. 수신이란 오늘날의 연예기획사에서도 연습생들 대상으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이른바 인성교육이다. 

오케음악무용연구소 3기 에이스 백설희. 1950년대. (사진 : 한국콘텐츠진흥원)

이철의 파란만장한 스토리는 이곳에 잘 정리되어 있다

오케음악무용연구소는 3년 과정으로 교육비가 면제되었고 세련된 디자인의 제복을 받았다.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아 숙련이 되면 조선악극단 무대에서 백댄서나 코러스로 출연하게 되고, 기량이 뛰어난 사람은 3년차 정도에 솔로 무대의 기회도 주어졌다.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3년차가 되면 상당한 액수의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광복 이후 대중가요에서 크게 활약한 백설희는 1942년 3기생으로 선발되어 1944년 졸업 직전에 첫 솔로 무대에 선 경우이다. 백설희의 대표곡으로 "봄날은 간다"가 있다. 당시 40명 중 3년 뒤 졸업한 수는 9명 뿐이었다. 이 외에도 강윤복, 심연옥, 주리 등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백설희는 황해와 결혼하여 전영록을 낳았다. 전영록은 배우 이미영과 결혼 해 전보람전우람을 낳는다. 

 

실용음악의 탄생

1987년은 국악, 클래식을 제외한 모든 음악이 '딴따라 음악' 에서 벗어나 '실용음악'으로 변신한 역사적 해이다. 서울예술대학에 최초로 실용음악과가 신설된 것이다. 기존의 클래식음악과 차별화 하여 대중음악을 학문화 하게 된 것인데, 일찍이 독일에서 음악 전문가 외의 대중이 연주할 수 있는 쉬운 음악을 Gebrauchsmusik (실용음악, 영어로는 utility music) 으로 정의한 개념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클래식 교육을 받는 "음악과" 와 구분하여 클래식 아닌 모든 음악을 실용음악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사실상 팝과 재즈 중심의 대중음악을 가르치는것이 분명한데도 "대중음악" 또는 "상업음악"이라는 이름에 대한 거부반응이 대단히 강하여 실용음악이라는 명칭의 대안이 없는 현실이다. 실용음악과는 현재 우리나라 대학 학과 중 가장 높은 경쟁률과 가장 낮은 취업률을 기록하고 있는 학과이다. 전국 2~4년제 대학에 개설된 실용음악학과는 무려 98개이다. (학점은행제 학교, 콘소바토리는 제외)

실용음악이라는 용어의 시작에 대해 - 색소폰 연주자 고 정성조 교수의 빅밴드콘서트 중 인터뷰
실용음악과는 지금 서울예대 유덕형 학장이랑 같이 1987년도에 만들어 낸 이름이다. 기존의 방식이 아닌 좀 더 새로운 음악을 가르치는 학과를 만들고 싶었다. 학과 이름을 둘이서 같이 고민했는데, 처음에 나온게 상업음악과다. 그런데, 입에 안붙고 뭔가 이상한거다. 그래서 응용음악과를 할까 하니까 응용미술과 표절한거 같고,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다 실용적인 음악이란 뜻에서 실용음악과가 탄생했다. 이렇게 실용음악과가 인기있을 줄 알았다면 그 말에 특허라도 낼걸 그랬다. 그랬으면 지금쯤 빌딩 몇채는 지었을텐데...

정성조는 한국 재즈 1세대 색소폰 주자로 많은 활동을 했고 버클리음대를 거쳐 서울예대 학과장으로 정년퇴임하고 서울종합예술학교 실용음악학부장으로 재직 중 2014년 별세하였다. 

고 정성조 교수

 

 

채승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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