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 총소리
영화의 주요 배경 중 하나인 삼각지 육군본부 (국방부, 현 용화대) 지하의 B2벙커는 내가 군복무 시절 근무하던 곳이다.
신용산역 쪽 근무지원단 의장대 막사에서 생활하다 이틀에 한 번 꼴로 벙커에 들어가 야간에 경계근무를 섰다. 벙커 깊숙이 들어가다 보면 벽면과 천정에 총탄의 흔적이 있었다. 선배들은 그게 북한의 남파공작원 31명이 청와대 박정희 암살을 목표로 서울에 침투했던 김신조 사건때 생긴 총탄흔 이라고도 했고, 12/12 사태때 총탄이라고도 했다. 서울의 봄 영화에서는 군 장성들이 똥개처럼 도망친 육군본부에 반란군이 무혈입성 한것으로 묘사되는데, 내가 듣기로는 실제 반란군과 B2 벙커에서 총격전이 있었다고 했다.
영화에서 간간히 벌어지는 총격씬의 사운드는 잘은 모르지만 총기 종류별로 섬세하게 디자인 된것으로 느껴졌다. 오스카 상에서 사운드디자인 부문 수상작은 전쟁영화가 많은데, 총포류의 사실적인 표현이 생각보다 까다롭고 어렵기 때문이다. 총소리가 다 똑같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시간의 제약이 없다면 1년, 2년을 매달려도 완성하기 어려운 것이 전쟁의 총포 사운드 디자인이다. 이 영화에서 총소리의 타격감과 테일의 길이가 적당함은 영화적 감동 전달에 큰 보탬을 준다. 영화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대사의 전달이기 때문에 총포 사운드 사이 사이의 대사의 명료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운드를 맡은 라이브톤 최태영감독은 영화감상 후 청감만족도가 상당히 높은 음향감독 중 한 분이다. 영화 도입부 회의 장면들에서의 다소 불쾌한 룸 톤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줄거리와 감정이 빌드업 되면서 더이상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은것은 다행이다.
군가, 노래소리
영화가 끝난 뒤 한참을 앉아있었다.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음악은 ‘전선을 간다’ 라는 군가였다.
훈련소 시절 입에 단내가 나도록 불렀던 혐오스러운 군가들 중 유일하게 괜찮다고 느꼈던 곡이다. 군가 치고는 가사가 매우 시적이라고 생각했었다. 노래의 작가가 로보트 태권V 주제가의 작곡가라는 것은 매우 오랜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되었다. 영화에서의 ‘전선을 간다’는 원곡과 달리 매우 느리게 편곡되어 합창으로 불려진 변주곡인데 이것이 나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원래 군가는 발라드가 없다. 독려하고 북돋우고 자극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편 느린 음악은 여유를 주고 생각과 감정을 수반하는 ‘위험한 것’이다. 자발적으로 군대를 가지 않는 한국의 징병제 사병들에게 생각과 감정을 허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분명, 영화의 끝자락에서 들려주는 느린 군가는 생각과 감정을 한껏 고조시킨다. ‘박하사탕’과 ‘오아시스’를 거치며 알게된 이재진 음악감독의 작정한듯 한 의도가 다소 정직하게, 다소 뻔하게 연출된 지점이다. 이를테면, 미끼인줄 알면서도 기꺼이 그 바늘을 입속에 넣는 능동적 도취인데 만약 영화 중간에 이러한 낚시질같은 시도가 삽입되면 실망스러운 신파가 되고 말았을 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서울의 봄은 신파를 잘 피하면서 프롤로그의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게 해 준 힘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음악의 힘이다.
작전, 북소리
다른 감독의 작품이지만,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북소리의 기억이 오래 남았었다.
극 중 잠깐 나오는 어린이무용단 공연장면에서 연주되는 6고무 북소리는 유독 이머시브하게 믹스되어 있었다. 영화의 전반에서 맥락없이 등장한 바이노럴 (실제 귀로 듣는듯 한 입체음향 재현 기법 중 하나. ex-ASMR ) 사운드의 연출적 의미는 끝내 발견해 내지 못하였지만 적어도 그 장면을 나에게 각인시켜주는 역할은 했다. 긴장이 생명인 액션, 공포, 서스펜스, 미스터리물에서 타악기의 역할과 능력은 실로 지대하다. 극중인물 박용각이 차에 실려 납치되는 작전의 앞뒤로 겹쳐지는 어린이무용단의 공연은 ‘별것 아닌 대통령의 업무적 일상’을 나타내는 메타포이지만, 그 순간 나를 각성시킨 6고무의 사운드는 미국 현지에서 수행되는 작전의 긴박함과 요원들의 내적 긴장을 극대화 하여 표현해 준 영화적 장치로 동작했다.
장소, 감정의 증폭
142분에 달하는 서울의 봄 러닝타임 중 여자가 등장하는 씬은 전두광과 이태신의 처, 요정의 장구치는 기생을 포함해 (아마도) 도합 5분도 안된다. 군인과 군인, 긴장과 짜증이 작품의 처음과 끝을 연결한다. 그 동굴같이 길고 어두운 영화 속 아주 짦았던 장구춤 역시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 연희동 한 고급요정 안에서, 양 측의 팽팽한 대치 사이에 살얼음을 타듯 연주되는 장구연주는 너무도 극적이고 절망적이고 공포스럽다. 아무런 선택도 권리도 힘도 없는 이의 장구 연주는 간절하기 그지없어서 제발 아무일 일어나지 말고 이순간이 지나가기만을 풍전등화처럼 애원한다. <서울의 봄> 에서 고발하는 거대한 권력의 폭압 앞에서, 모든 국민 하나 하나 그와 같은 입장이고 같은 심정이기에 감정의 이입이 소리의 속도로 이루어지고, 식은땀이 궁편 위 채편 끝에서 관객과 함께 진동을 한다.
영화 속에서 메세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단시간에 감염시키는 매체가 음악을 비롯한 사운드이다. 그리고 매우 집중하여 감상하지 않으면 이 조촐하고도 거대한 효과는 무심히 낭비되기 쉽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 얻는 장점 중 하나다.
채승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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