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안중근을 다룬 작품을 김훈의 소설 하얼빈으로, 뮤지컬 영웅으로, 영화 하얼빈으로 보았다. 그 중 영화 하얼빈이 나에게 가장 아쉬움을 남긴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영화는 호흡이 다소 길고 하나의 상황을 길고 느리게 묘사하는 장면이 많다. 쉽게 말해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는 씬이 다수 있다. 보통 이런 류의 영화에서 관객은 사건 위주의 표현과 빠른 전개를 기대하지만, 이 영화는 등장인물의 감정과 사상을 조망하는것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장면들은 이해할 수 있다. 영화 하얼빈은 등장하는 인물들의 가치관과 의지가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지고 발전되었는가를 정성들여 표현한다. 이 점에서 김훈 작가의 하얼빈 소설과 닮아있다. 다만 실제 역사와 다른 허구의 요소가 영화에서는 극적인 요소로 다소 활용된다. 이것은 상이한 미디어와 콘텐츠가 가질 수 있는 특성이다.
그렇다보니 결의의 원대함과 사안의 중요성을 드러내기 위해 감독은, 영화는, 큰 스케일의 화면을 압도적으로 활용한다. 그런데 활용이 남용으로 둔갑하는것은 순식간이다. 안중근이 걷다 쓰러지고 길을 잃어버리는 얼어붙은 두만강은 광활하기가 아마존강 수준으로 묘사된다. 영화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전투씬은 글래디에이터의 그것을 연상시키듯 치열함과 잔인함이 잘 묘사되지만, 총 몇 발 쏘고 바로 온몸으로 총알받이를 자처하며 백병전으로 돌입하는 어설픈 플롯은 전투 이전에 이미 몰입감을 방해하기도 한다. 실제로 눈밭에서 벌어지는 이 장면의 바탕이 되는 신아산 전투는 1908년 여름에 벌어졌다고 한다. 공씨부인과 말을 타고 폭약을 얻기 위해 만주로 떠나는 여정은 끝없는 모래사막과 눈보라가 교차하며 흡사 "듄" 같은 광경을 보여주지만, 거사를 불과 일주일 남기고 급하게 다녀오는 여정으로 어울리지 않는 과장된 묘사로 느껴졌다.
연기력의 이슈도 있다. 주연과 조연 모두 이름있는 연기자들이 맡았고 생각보다 아는 얼굴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김상현 역의 조우진 배우 정도를 제외하고는 연기력이 뚜렷하게 빛을 발하지 못한다. 현빈, 박정민, 정우성, 유재명, 전여빈 등의 연기는 중간정도의 수준으로만 느껴지는데 이는 정확히는 연기력의 문제라기 보다는 연기자를 둘러싼 배경과 연출의 문제가 더욱 컸다고 보여진다. 여기서 '배경'이라 함은 화면의 톤과 앵글 안의 세트, 소품, 조명, 사운드 등을 복합적으로 지칭하고자 하는 단어다. 그리고 당연히 '연출'이라 함은 같은 연기자를 어떻게 활용하는가 혹은 소모하는가에 대한 감독의 시각과 역량 문제일 것이다.
영화 하얼빈의 특이점 중 하나는 대사의 명료함이다. 한국 영화의 많은 경우 대사 전달력의 부재로 인한 답답함이 큰 단점이라 지적한다. 이 점은 자막으로 대사를 습득하는 해외 관객에게는 이해의 영역이 아니며 단점에 해당되지 못할 것이다. 해외에서 극찬을 받고 상을 받아도 내수 관객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바로 한국어 대사가 안들린다는 것이다. 여전히 동시녹음의 비중이 큰 한국영화에서는 대사 잘 안들리는것을 "고질적"이라 입을 모아 말들 한다. 그런데 영화 하얼빈의 사운드는 전반적으로 매우 선명하다. 가령 안중근의 사형 집행 장면에서 머리에 보자기를 쓴 주인공의 숨소리는 소름이 돋는다. 음악은 생생하고 엠비언스는 딱 필요한 만큼만의 레벨을 넘지 않아 때로는 부족하게도 느껴진다. 한데, 이것이 부작용일까. 영화 전체의 배경과 톤은 거칠고, 긴박하고, 두렵고, 억눌리고, 고생스럽다. 그래서 선을 넘은 지나친 깨끗함이 오히려 몰입감을 방해한다.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기차역에서도, 승객들로 가득찬 증기기관차 안에서도 군중과 공간의 소음은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대사는 잘 들리지만 장면의 현실감이 부족하게 다가온다. 대사가 답답해서 안들리면 안들려서 불만인데, 또렷하게 잘들리면 또 잘들려서 불만이다. 적절한 선을 지킨다 혹은 모두를 만족시킨다는 것은 이렇게 어렵고 어려운 일인 것이다.
음악의 퀄리티가 매우 좋다는 느낌이 도입부로 부터 강하게 주입된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오히려 감상을 방해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영상을 뒷받침하는 BGM의 역할을 넘어서 음악이 주인공인가 싶을 정도로 전면에 부각되는 씬이 많아서다. 그리고 연주나 음질의 우수함에 비해 각 씬을 표현하는 음악적 내러티브는 다소 뻔하다. "이런 장면에는 이런 음악이지" 라는 식. 만약 음악이 이토록 선명하게 잘 들리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거나 굳이 기억하지 않았을 부분이다.
경험상 사운드가 좋아서 영화가 별로인 영화는 지금까지 없었다. 영화 하얼빈은 그래서 더욱 기억에 남을 영화가 되었다. 연기와, 세트와, 코스튬, 그래픽, 보이스 더빙과 음악 믹싱 각각 떼어놓고 보면 그닥 불만스럽지 않다. 그렇지만 이들이 결합되어 영화라는 하나의 콘텐츠를 이루었을 때는 전혀 다른 평가의 대상이 되고 만다. 영화는 다수의 창작자와 스텝이 참여하지만 공동저작물이 아닌 결합저작물로써의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채승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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